역사를 알면 지원재단의 개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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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북한이탈주민정책참여연대(이하 북정연) 공동대표 한창권입니다. 요즘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의 개혁과 관련한 탈북민사회의 관심이 매우 뜨겁습니다. 입이 있어도 북한당국이 무섭고 두려워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던 탈북민들이기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 이 땅에서는 지원재단 개혁과 관련해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소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가능하면 좀 더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의견들이 모아졌으면 하는 아쉬움과 바램을 가져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의 지원재단 개혁과 관련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평소 제가 갖고 있던 역사를 되새겨 오늘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 탈북민들은 모두가 고향이 북한입니다. 저도 함남도 함흥이 고향이고 92년 쏘련으로 파견될때까지 태어난 집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뜬금없이 지원재단 개혁과 역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아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이 글을 읽어보시면 저의 뜻을 조금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토,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특히 일요일 오후 탈북민 축구동호회원들과 4시간이상 축구를 하고나서 회원가족들과의 친목과 단합을 갖는 간단한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오피스텔로 급히 돌아옵니다. 요즘 KBS 제1 TV에서 주말 밤 9시뉴스 이후에 방영하는 사극 “정도전”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정도전’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사극을 남다르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극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적사건들과 그 주인공들이 펼치는 갈등과 대결, 온갖 지략과 권모술수.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싸움의 동시대를 체험한다는 것은 정말 짜릿한 감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관심 갖게 되는 부분은 승자와 패자의 결말과 그 원인,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역사적 사건들과 그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내면세계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에 사는 우리를 돌이켜 반성하고 앞날에 대한 예측을 어렴풋이나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사극이 갖는 심오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원재단 개혁과 탈북민, 그리고 우리 역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 관계를 간추려 평소 저의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탈북민들은 북한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극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거슬러 돌이켜보면 단군 이래 반만년 역사동안 거의 대부분 북쪽사람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통치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금의 영토는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조선을 세운 1392년 7월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북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을 정립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근대에 이 한반도를 다스려온 군주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1392년~1910년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종 500여년동안 태조 이성계가문이 나라를 다스려 왔음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은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금야군(옛 영흥군)이며 활동은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도소재지 함흥에서였습니다. 함흥에 가면 태조 이성계의 역사 유적지가 많습니다. 함흥차사의 유래가 생긴 본궁이란 지역에 실제 이성계가 살던 궁도 역사박물관으로 존재합니다. 제가 요즘 단1회도 빠짐없이 보고 있는 사극 ‘정도전’ 최후의 정적인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번째 아들로 조선의 3번째 왕이고 조선의 가장 위대한 성군인 세종대왕의 아버지로서 그분의 고향은 함흥입니다.
 
우리나라의 중세국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고향은 개성입니다. 그 훨씬 전 고대국가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도 당연히 북쪽사람입니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북쪽 사람입니다. 36년간의 일제식민지에서 나라를 되찾은 다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38선 북쪽은 평안도가 고향인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고 남쪽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역시 북한 황해도 평산 사람입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더불어 일제에게 빼앗긴 조선을 독립할 목적으로 세운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주석도 북한 황해남도 해주사람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며 올해로 남북이 분단이 된지 69년째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4.19로 물러난 1960년까지 북한 사람들이 남북을 다스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약간 과장된 표현을 빌린다면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후기간을 제외한 반만년역사대부분을 말입니다. 한반도의 절반인 남쪽의 대한민국은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권부터라고 할 때 이제 겨우 54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54년이란 기간은 100분의 1에 불과하며 그것도 한반도의 절반만이 남쪽사람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갖고 살아온 우리 탈북민들은 북한의 악명 높은 3대 세습독재를 탈출해 고향을 떠나 현재 한반도의 절반 남쪽의 대한민국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극‘정도전’을 보면서 성군인 세종대왕의 아버지 이방원이 조선건국의 공신시절 정도전에게 하는 대사가 가장 가슴에 와 닿습니다. 자신의 40년 지기인 정몽주를 고려수도 개성 선죽교에서 척살한 이방원을 나무라며 돌아서는 아버지의 친구인 정도전의 등 뒤에 이방원은 이런 말을 합니다. “숙부님! 아십니까? 정적의 선혈이 묻은 칼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다음 정도전에게 우리나라 8도의 국민특징에 대해 분석하라고 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도전이 전국 8도의 국민특징을 요해하고 보고하면서 생겨난 단어가 ‘이전투구 (泥田鬪狗)’인데 우리 말 사전에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전투구 (泥田鬪狗)’[명사]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이르는 말. 저는 지나간 어느 주말 사극 ‘정도전’ 초반기에 홀로 누워 TV를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글쎄 태조 이성계가 살던 함흥(옛 조선의 동북면)의 ‘구천각’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것 이였습니다.
 
고향의 그리움은 고향을 잃은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순간에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함흥의 역사유물 ‘구천각’은 함흥시 동흥산(옛 반룡산)자락에 웅장한 석조 건물로 서있으며 제가 살던 집에서 2.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함흥의 제일 경치 좋은 곳에 있는 김일성동상 뒤로 1Km 낮은 산등선의 잘 포장된 길을 따라 가면 이 유서깊은 ‘구천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태조 이성계가 살던 본궁은 흥남 바다쪽으로 12Km정도 떨어져 있어 맑은 날에는 본궁도 볼수 있습니다. 30년전까지 함흥의 7개 구역중 하나로 “본궁구역”이 있었고, 역전이름도 “본궁”역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가장 큰 화학공업공장인 함흥2.8비날론공장이 위치한 곳이지요. 이런 역사유적지를 어느날 김일성의 지시로 다 바꿔버렸습니다. 본궁구역은 은덕구역으로 바뀌고 본궁역전은 없애고 비날론역과 은덕역으로 나누고 본궁은 그대로 있으나 역사박물관으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600년 된 버드나무와 토담으로 둘러 쌓여 음침하며 관리원 영감 1명이 풀이나 뽑으며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사포구역 수변종합진료소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으며 저희 진료소에서도 본궁역사박물관이 훤히 보입니다.
 
제가 사극 ‘정도전’에서 함흥의 ‘구천각’사진을 보고 벌떡 일어난 것은 그 ‘구천각’과 저하고는 특별한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흥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흥산자락의 구천각에는 대리석으로 잘 다듬은 태조 이성계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비석문에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 이성계가 구천각에서 활을 쏜 다음 말을 타고 본궁으로 달렸는데 궁에 도착하는 순간 버드나무에 화살이 날아와 동시에 박혔다’는 문구와 ‘여진족을 물리치고... 홍건적을 물리치고 어쩌고 저쩌고... 등 글들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납니다.
 
저는 함흥에서 태어나고 살면서 책에서 배운대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당시 왕을 배반하고 위화도 회군 즉 정변을 일으킨 역적으로만 알았고 또한 이성계가 함남도 영흥이 고향이고 함흥에서 성장하고 활동했다는 사실조자 몰랐습니다. 오직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를 반복해 공부해야 하니 언제 500년전의 왕이 누구고 그의 고향이 어딘가에 대한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또한 사회적분위기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와서도 사극 ‘용의 눈물’을 빠짐없이 보고도 그것이 제 고향 함흥사람들이 펼치는 조선초기의 중요한 역사적사건임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함흥차사’란 말도 제가 다니던 수변종합진료소 앞에 있는 역사박물관 이성계의 본궁과 관련된 일화인줄 북한에선 몰랐습니다. 최근 사극 ‘정도전’을 보는데 갑자기 함흥 ‘구천각’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함흥의학전문학교(4년제 의학전문대학) 다닐 때 대학 마라톤선수였습니다. 대학입학도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였고, 도를 대표해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 9월5일상 체육대회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전국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함흥의 북서쪽에 치우쳐있는 서울 남산높이의 함흥 동흥산 구천각에 올라 마라톤 맹훈련을 하곤 하였습니다.
 
함흥동물원을 지나 구천각으로 올라가는 15도 경사의 700m 정도 길이의 굽이굽이 오르막이 있습니다. 마라톤훈련에서 매우 중요한 경사지를 이용한 인내력 극복훈련은 이곳이 적격이었습니다. 계단도 있어 계단추기도 이곳에서 하였고 아침 조기 운동도 이 코스를 달리곤 하였습니다. 조기운동으로 여기까지 왔다 가면 5Km를 뛴 것이고 구천각에서 성천강쪽으로 1Km 내려와 김일성 동상 앞 도로에서 시작되는 함흥을 감돌아 흐르는 성천강위에 놓인 만세교다리 넘어 끝까지 뛰어 갔다 오면 매일 조기운동으로 3Km 달리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 설명을 한다면 구천각은 저의 구슬땀이 배인 곳이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곳 구천각은 저에게 남다른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14살 때인(40년전) 1974년 6월 말경(이맘때라고 기억됨) 당시 저는 학급반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오후 1시부터 공부하는 오후반이었고 학급별로 대열을 지어 등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열을 짓기 위해 모인 장소에서 같은 학급의 박상현(별명 사팔)이란 친구가 갑자기 구천각에 가면 아카시아나무에 아카시아가 꽃이 많이 열렸고, 때기복숭아(산에서 나는 작은 복숭아)를 많이 따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저는 갑자기 마음이 흔들려 전체 학급을 이끌고 구천각 군사놀이를 떠났습니다. 학교에서 6시간 정규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까지 모임장소에 도착하지 않는 몇 명 학생들은 뒤따라오게 조치까지 취해놓았습니다. 초여름의 그날 날씨도 꽤 좋았습니다. 그때 저희 학급은 54명이었습니다. 모두 마음이 들떠 공부생각은 까 맞게 잊고 구천각으로 무리지어 몰려가 저녁 늦게까지 넥타이를 풀어오는 게임을 하였습니다. 편을 갈라 양쪽 진지의 높은 소나무가지에 걸어놓은 넥타이들을 어느 편에서 먼저 풀어 오는가에 대한 게임이었습니다.
 
뒤따라 늦게 도착한 친구들도 합세해 오후 종일 신나게 웃고 떠들고 놀면서 아카시아도 따먹고 때기복숭아도 따먹었습니다. 정신없이 재미나게 놀다가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니 학교에서는 비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1개 학급의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학교에 등교하지 않은 대형사건이 발생했으니 저희 학교로 구역 당 책임비서와 구역안전부장(경찰서장)이 함께 나오고 구역의 당, 교육담당. 행정책임간부들이 모두 학교로 총출동했던 것입니다. 아마 북한 역사상 중학교에서 학급 전체가 학교수업에 참가하지 않는 이런 사건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학교 초급당에서 비상동원령을 내려 밤늦도록 저의 학급학부형들을 다 불러 모으고 주모자를 색출하고 다음날까지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주동자인 저를 시범적으로(일벌백계) 1년짜리 소년교도소에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제가 계획한 것이 아닌 우발적으로 학급 친구 박상현의 꼬임에 빠졌다는 것과 특히 제가 학급반장이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높게 평가되어 시범에 걸려 소년교도소에 가는 일은 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였는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저의 유년시절과 사극 ‘정도전’에서 나오는 태조 이성계의 본궁과 이방원의 고향이 한 고향이여서 그런지 ‘정도전’을 그 다음부터 더 흥미 있게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두서없이 탈북민의 뿌리와 우리나라 근대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피할 수 없는 지원재단의 개혁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에 온 탈북민들은 본의 아니게 김일성과 같은 독재자를 잘못 만나 인간생지옥 북한을 탈출해 고향을 등지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 이 땅에서 어려운 정착생활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탈북민들의 어려운 정착지원을 위해 정부는 지원기관을 설립하고 25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이러한 탈북민정착지원금을 지원재단은 탈북자들의 정착에 실제로 도움 되는데 쓰기보다 각종 명목의 인건비로 쓰고 있습니다. 탈북자지원금을 더 타내려면 국회에서 가까운데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며 여의도의 비싼 사무실을 계속 고집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효성이 없거나 의문되는 사업들을 벌려놓고 문제의 심각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법정사업이라고 우기며 마이동풍식입니다.
 
이런 지원재단 행태를 바로잡으려고 탈북단체장들이 사업설명회를 요구하고 있으나 지원재단은 공공기관이 사업설명회를 한 사례가 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심지어 탈북자들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라는 기관이름이 길고 부르기 어렵고, 타인에 거부감이 있다는 등등의 구실을 붙여 별칭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탈북민들의 마음에 대 못질 하는 것이라고 여러 방법으로 수차 이야기 하여도 자신들은 법정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재단이사회를 통과해 통일부장관 승인을 받았기에 ‘남북하나재단’이란 별칭도 그대로 쓰는데 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원재단 이사회는 왜 하며 누구를 위한 이사회인지? 지원재단에 묻고 싶습니다. 원활한 탈북민정착지원사업을 토의하기위한 이사회를 해야지 탈북민들이 거부하는 별칭이나 만들고 효율성 없는 사업을 법정사업이라고 밀어붙이는 이사회가 되고 거기에 통일부 장관까지 승인한다면 그건 무법천지 재단이사회지 정부산하의 공공기관이 할 행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원재단의 이 모든 행태는 탈북민들을 우습게보고 하는 행위들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왜 위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줄 조금 이해되시는지요?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적으로 경제규모가 15위안에 드는 경제대국으로서 북한의 경제보다 17배 크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이런 위상으로 우리민족의 고질병인 허풍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속된 말로 ‘까분다’는 것입니다. 반만년 역사에 몇 십년 좀 잘 산다고 해서 겉멋이 들어 안하무인으로 변해 간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 살아서 온 탈북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보려는 마음보다 군림하려는 못된 버릇 때문에 이런 행위들이 죄의식 없이 행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다 는 연설에 들떠 허상에 물젖어 북한 땅은 다 저들이 차지할 것처럼, 땅과 지하자원에만 관심 있고 북한주민이 당하는 인권유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즉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쪽이 돈을 벌면 한쪽은 쪽박을 차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병폐입니다. 지원재단의 지금과 같은 언행의 진솔한 탈바꿈이 없는 한 탈북민들과 정착지원기관인 지원재단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됩니다.
 
지원재단은 탈북민 이름으로 책정되는 국가보조금을 받아 그 정책 수효자들인 탈북민들과 실효성이나 효율성, 형평성이나 적법성의 상의도 없이 자기들 사업으로만 생각하고 예산을 써버리고 있습니다. 지각 있는 탈북민들과 탈북단체장 여러분! 우리의 근본을 잊지 말고 지원재단 개혁을 위해 다함께 끝을 볼 때까지 투쟁합시다. 소신과 끈기를 가지고 자신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시민의식입니다. 긴 글 감사합니다.
 
한 창 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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