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 72인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 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
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包圍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며,
또 일설에는 동 두문동과 서 두문동이 있어서
동 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산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후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表節祠 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杜門洞實記 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杜門不出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충의를 지킨 사대부들을 보면서 지금처럼
東家食西家宿 하는 정치인들에게 警鐘이 되었으면 한다
擇里志에도 이 사실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더욱 괘씸한 것은 정도전이 牧隱 李穡의 門徒로서,
고려 말기에 재상 반열에 있으면서 禽獸 보다 못한 일에
黙言하였다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서 제 자신의 사리를 채우고 스승을 해하며
벗을 죽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려가 망하자 또 왕씨의 종친을 없애기 위한 꾀를 내었다.
즉 자연도(紫燕島)에 귀양 보낸다는 말로 속인 후
큰 배에다 왕씨들을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비밀리에 배 밑에 구멍을 파서 가라앉게 한 것이다.
배 밑 구멍 파서 배를 가라앉게 한 사건 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姓을 바꾸어서
玉氏 全氏로 改姓한 사람도 不知其數 였다 한다
조선을 창업하는 데는 1등공신 이었으면서도 ‘
두 왕조를 섬긴 變節者’, ‘처세에 능한 모사가’, ‘
아예 없었어야 할 사람’으로 평가된 채
역사의 물밑 속으로 잠긴 삼봉(三峰) 정도전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
榮光은 이씨 왕조에게,
汚辱은 삼봉 정도전에게 씌워야 할까 ?
무슨 일이든 强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삼봉은 결국 이방원에 의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强은 부드러움만 못하다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