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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스틸 컷 |
| ⓒ ㈜하이브미디어코프 |
정치적 논란을 낳은 영화 <암살자(들)>은 제목부터가 논쟁적이다. 암살 관련자가 1명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이 영화를 이끈다. 영부인 피격 사건을 재일교포 문태광(박정민 분)의 단독 행위로 몰고 가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이 있고, 문태광의 배후를 캐고자 하는 기자 두 명과 경찰관 한 명의 움직임이 있다. 영화 제목은 그런 두 흐름에 부합한다.
영화는 문태광의 배후 문제와 더불어 정권의 자작극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위의 '경찰관 한 명'인 박철구(유해진 분) 형사는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인 서울 남산 국립극장의 출입문에서 의심스러운 일을 겪는다.
행사 시작 전에 박철구는 비표 없이 입장하는 문태광을 저지한다. 그런데 다른 기관도 아닌 대통령경호실의 경호계장이 박철구를 제지한다. 경호계장은 문태광을 그냥 입장시킨다.
영화는 '총성'과 '탄흔'의 차이점을 부각한다. 위의 '기자 두 명'에 해당하는 동성일보의 김재환(박해일 분)과 한영일(이민호 분)은 문태광 이외의 저격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추적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정부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다.
영화는 정부 당국이 현장 증거를 없애고 현장 검증을 짜맞추기식으로 진행하는 모습, 중앙정보부가 언론사뿐 아니라 경찰관들까지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권이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뭔가 감추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장면들이다.
너무 판이했던 한국과 일본 수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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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스틸 컷 |
| ⓒ ㈜하이브미디어코프 |
영화가 아닌 실제 역사에서도 사건의 본질과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컸다. 유신체제하의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할 때 울린 총성과 함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쓰러진 1974년 8월 15일의 참극은 한·일 두 정부 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두 나라가 발표한 수사 결과는 너무 판이했다.
한국 정부는 사건의 배후가 북한과 조총련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 나흘 뒤인 같은 달 19일, '박 대통령 저격미수사건 수사본부'의 수사 결과가 언론에 다음과 같이 공개됐다.
한국 정부는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요코하마·고베·오사카를 오가는 성명 불상의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오사카부 이쿠노구서부지부 김호룡 정치부장이 배후라고 발표했다. 박정희를 살해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이 그들에 의해 문세광에게 하달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달리, 일본 정부는 한국 비판 활동을 벌이는 한국청년동맹(한청)과 1973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문세광과 연결했다. 1974년 8월 17일 자 <매일경제> 3면은 문세광이 김대중구출위원회와 한청에서 월급을 받았다는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를 전했다. 김대중을 바다에 빠트리려 한 중앙정보부의 만행에 분개한 문세광이 김대중 지지 조직과 관련을 맺고 박정희 독재를 무너트리고자 했다는 점을 일본 경찰은 강조했다.
이 같은 두 정부의 발표와 결을 달리하는 것이 한국 정부 개입설이다. 1974년 당시에도 수사가 불충분한 점, 문세광이 비표 없이 입장한 점,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권총이 적발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하는 의혹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명확한 결론 도출을 도울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 내 의혹 본국에 보고한 주일미국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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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스틸 컷 |
| ⓒ ㈜하이브미디어코프 |
주일미국대사관도 이 사건에 대한 일본 내의 의혹을 본국에 보고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1974년 12월 27일 자 주일미국대사관 보고서는 한·일 정부의 발표가 서로 달라 일본 내에서 의문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고 한 뒤, 이를 문세광에 대한 신속한 사형 집행과도 연관시켰다.
이 보고서에서 주일미국대사관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가 일본과 불일치한 것은 "문(文)에 대한 신속한 사형집행이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는 믿음을 강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 정부가 뭔가 숨기고자 사형 집행을 서둘렀다는 일본 내의 인식이 미국 정부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한편 당시 일본 정부와 특권층을 괴롭히는 반체제 조직이 있었다. 동아시아 재벌자본주의에 맞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그것이다. 이 단체는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도쿄 본사에 폭탄 공격을 가하고, 미쓰이물산·데이진중앙연구소·가지마건설·하자마구미 등도 공격했다.
또 한국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숨은 기능을 한다는 이유로 도쿄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도 공격했다. 이곳에 대한 공격은 한국 민중에 대한 연대감을 표시할 목적으로 1975년 4월 19일 단행됐다. 이 단체의 세계관 속에서는 한·일 지배세력이 한편이고, 한·일 민중이 또 다른 한편이었다.
바로 이 동아시아무장전선이 문세광의 한국 입국을 도운 인물과 접촉했다는 것이 일본 경찰의 뒤늦은 수사 결과다. 1975년 6월 3일 자 <경향신문> 7면은 <산케이신문> 보도를 인용해 "일련의 기업 폭파 사건으로 체포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일당이 반한(反韓)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재일한국인 조직과 8·15 사건으로 처형된 문세광과 문(文)의 여권 위조를 도와준 요시이 미끼코 등과 접촉을 했던 사실이 경찰의 조사에서 드러났다"라고 보도했다.
일본 경찰은 문세광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접촉 사실에 더해 추가적인 자료도 찾아냈다. 이 단체 조직원인 아라이 마리코의 집에 문세광 사진이 있었던 점도 알아냈다.
위 <경향신문>의 6월 16일 자 7면에 의하면, 문세광은 고등학교 시절인 1969년부터 폭력혁명고교전선이라는 반체제 그룹에 가담했다. 반일무장전선과 컬러가 비슷한 단체 활동을 10대 때부터 했던 것이다.
문세광과도 접촉하고 문세광의 여권 위조를 도운 인물과도 접촉한 반일무장전선은 그가 한국에서 일을 벌이기 하루 전인 8월 14일에 히로히토를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히로히토가 탑승한 열차를 폭파하는 것이 이 단체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했다.
그날 터지지 못한 폭탄은 육영수 피격 보름 뒤의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때 사용됐다. 8월 14일에 일왕의 열차에서 폭탄이 터진 다음날에 서울 국립극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훨씬 더한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육영수 피격을 북한과 조총련이 벌인 일로 몰고 가고자 애썼고, 일본 정부는 김대중-박정희 갈등 구도 속에서 이 문제를 부각했다.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끈 뒤에, 위와 같이 뒤늦게 일본 경찰 수사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의 관련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정부는 기존 수사 결과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의 그 일은 아직 사건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한·일 양국이 계속해서 규명해 나가야 할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