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전신인 옛 안기부는 1998년 10월경까지 자유를 찾아 수많은 사선을 넘어 찾아온 탈북자(시대마다 탈북자 이름은 달랐음) 대부분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두들겨 패던, 정말 탈북자들에게는 생지옥 같은 이름이다.
당시의 국내입국 탈북자조사시설이던 ‘대성공사’라는 곳은 북한의 감옥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된다...
1994년 8월 필자는 대성공사 입소 직후 낯선 곳에 온 탓으로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2년동안의 타국에서 불안한 망명생활이 끝났다는 기쁨도 교차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시 필자는 8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입국했었다.
곧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여의사도 섞여있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팬티까지 홀딱 벗으라는 살벌한 지시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현장의 무거운 공포분위기에 눌려 별로 변명도 못한 상태로 알몸상태가 되었다.
5~6명의 조사관들이 빙 둘러서서 저들끼리 희희 낙낙 거리며 일부는 성기를 만지기도 하면서 포경수술을 했나?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성기포경수술을 하지 않는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것을 며칠 후에야 알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멸감과 증오에 치가 떨린다.
간단한 신체검사 후 바로 조사가 시작됐는데 함께 온 8명이 각자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 5~6명이 필자를 가운데 두고 무릎을 꿇린 상태로 빙 둘러서서 ‘북한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야기하라,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너는 살아서 여기서 못나간다. 네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만약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오늘밤에라도 너를 몰래 38선 넘어 북한에 보내버리겠다. 너를 지금 당장 화장시켜 버려도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그들의 폭언에 얼마나 가슴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쭉 빠져 허탈한 심경이 돼 버렸는지 모른다.
저는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 어려서부터 배고픔과 고난을 밥 먹듯 하면서 자라 나름 깡 끼가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당시 조사관들이 ‘밤에 몰래 38선 넘어 북한에 보내버리겠다’는 말에 정말로 가슴이 무너지는 허탈함과 공포감을 느꼈는지 지금도 당시의 상황이 어제 일처럼 눈에 생생하다.
손에 곤봉을 든 조사관들이 문을 열고 드나들 때마다 옆방에서 조사받는 함께 온 동료들이 곤봉과 참나무곡괭이 자루에 피 멍이 들도록 맞으면서 ‘아이고, 아이고’ 고래고래 고함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어떤 때는 꿈속에서도 그 장면이 재생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으론, 러시아에서 온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탈북자들의 권리를 찾고자 당시 안기부를 상대하여 들고 일어났던 1998년 10말경까지 국내입국 탈북자의 80%이상이 근 50년동안 조사과정에서 대성공사를 비롯한 국가권력들로부터 잔인한 고문과 폭언과 학대를 당했다고 생각된다.
1998년 12월 13일, 당시 안기부 처장이라는 사람이 집요하게 우리의 단체결성을 방해하고 심지어 당일 자유북한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필자에게 “야, 이 새끼야 너 여기 살려고 왔지? 앞으로 어떻게 사나 두고 보자.‘ 하면서 전화로 협박까지 하던 시절이다.
첫 탈북자들의 자율조직인 ‘자유북한인협회’는 단체결성 후 1999년 1월 15일, 천주교명동성당 3층 대강당에서 15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안기부를 비롯한 국가공권력에 의한 탈북자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이때 남한의 실정을 전혀 모르던 자유북한인협회의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폭로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단체가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이다.
민변과 함께 참여연대, 경실련,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 민주화추진가족협의회 등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당시 민변(임*하 변호사), 참여연대(차*직 변호사: 이분은 실향민2세로서 부모가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임), 천주교인권위원회 오창익사무국장(현재 인권연대 대표)등이 조사과정에서 탈북자들에게 관행적으로 폭행하는 안기부의 인권유린행위를 못하도록 우리를 도운 단체들이다.
정말 저로서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고마운 분들이고 시민단체들이라 생각한다.
이 단체들 도움으로 우리 자유북한인협회 회원들이 굴하지 않고 끝까지 안기부와 맞서 싸워 승리할수 있었고 결국 탈북자지원법 개정을 통해 오늘과 같이 탈북자들이 고문을 당하지 않고 여행을 갈수 있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정착금이 3배(1400만원에서 3900만원으로 상향), 1999년 7월10일 하나원이 설립되고, 특히 당시까지 탈북자들은 요시찰인물들이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외국에 못나가게 하던 제도를 바꾸어 단수여권을 발급받아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되므로 한국에 먼저 온 탈북자들이 3배로 뛰어오른 정착금 받은 걸로 여권을 발급받아 중국으로 나가 가족을 데려오는 대량탈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생계형수급자제도가 생기도록 법을 바꾸게 한 것도 민변이다.
민변에 대한 진실이 이러함에도 왜 대부분 탈북자들이 민변을 종북좌파단체로 매도하는지 필자는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민변은 대한민국사회의 어두운 곳,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단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안기부와 맞서 싸운 탈북자들의 첫 자율조직 ‘자유북한인 협회’를 아무런 보상 없이 도와주었다는 것은 당시 저와 함께 활동한 자유북한인협회 회원들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즘 지난 2016년 4월, 중국북한식당에서 일하다 탈북한 13명의 탈북자들에 대한 믿기지 않는 기획입국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어 필자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만 필자가 확신하는 것은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한, 현재 국내에 정착해 살고 있는 13명 탈북자들 중 민변에 의해서나 현 정부의 북한눈치보기정책에 따라 북한으로 북송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인권을 중시하는 법치국가이기 때문이다.
2018. 5. 15일 한 창 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