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값이 올랐다. '서민의 술'로 대표되는 소주 가격 인상에 소비자는 내내 울상이다. 소주는 우리나라에서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한 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소주에는 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신세 한탄부터 회사에서 있었던 스트레스를 꺼내놓는 일, 심지어 평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정치까지. 모든 것이 이야기의 화두로 오른다.
반면 북한에서는 술 먹는 사람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긴다. 특히 '양강도 들쭉술', '고려주', '개성 인삼술'과 같이 상표가 붙은 술을 으뜸으로 친다. 한 탈북민은 "남한 입국 후 노숙자들이 상표가 표시된 술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남한에 대한 환상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단순한 우스개 소리가 아닐 것이다. 술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북한 내 서민들은 기본적으로 명절이나 관혼상제에만 술을 먹는 것이 관례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서부터 일상에서 술을 먹기 시작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립되면서 일반 주민들의 술 소비가 늘어났다. 형편이 급격하게 어려워져서다. 심지어 10대마저 술에 중독되어 갔다.
술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늘어나자 김정일은 '당적으로 술풍을 철저히 없앨 데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려 사상 투쟁을 벌이도록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집에서 몰래 술을 담궜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밀주'다.
밀주라는 말 자체가 몰래 담그는 술이라는 의미인데, 이미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북한 여성치고 술 못 담그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가정에서 밀주를 자주 만들어 마신다. 장마당에 나오는 술의 대부분도 밀주다. 북한 주민들은 밀주란 말 대신 그들만의 은어로 '민주' 혹은 '농태기'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민주를 즐겨 쓴다.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민주의 소비가 급격하게 늘었다. 저렴한 가격에 민주를 구입할 수 있게 되자 서민들 속에 깊숙하게 침투했다. 술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이제는 북한 주민들도 술잔 속 이야기를 갖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하루를 한탄하거나 경제적인 고단함을 토로하는가 하면 정치적인 발언까지 서슴치 않는다.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 양상이다.
탈북자들은 민주의 소비가 늘어난 것에 대해 음주 발언에 대한 부담감이 적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북한 주민들은 음주보다 그 이후 음주 발언을 더 조심스러워한다. 김정일 시대에 특히 그랬다. 말 한마디 잘 못하면 정치범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김정은 시기에는 발언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보다 훨씬 덜하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이 상당히 높아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탈북민 이홍운 씨는 "민주는 말 그대로 民酒, 즉 백성이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다. 서민들은 예로부터 술을 들이키면서 자신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것이 그들의 오락이자 유흥이었고 낙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불가능했다. 발언에 대한 통제가 너무 엄격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은 민주를 마시면서도 전형적으로 굳어진 일상 이야기 외엔 꺼내지 않았다. 김정일 때가 제일 심했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서 이 씨는 "김정은 시대 와서 달라진 점 중 하나가 친한 지인들끼리 민주를 마시면서 정치적인 견해를 늘어놔도 더 이상 신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음주 후 김정은에 대해 직설적으로 험담을 쏟아내기도 한다. 민주가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주민들끼리 술 한 잔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 그게 바로 서민의 술 아니겠나"고 설명했다.
탈북민 김진석 씨는 "북한 주민들이 지금처럼 삼삼오오 모여 민주를 주고 받으면서 북한 체제에 대해 끊임없이 손가락질 해야 한다. 그래야 세뇌 정치의 틀이 깨진다. 맹목적인 순응이 아니라 깨어있는 비판이 필요하다. 민주는 그런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북한의 가장 대중적인 술로 꼽히는 민주는 분명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 곧 민주주의 아니겠나. '개성 인삼주'가 할 수 없는 일을 '민주'는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근 민주의 도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빨리 취하기 위해서다. 김 씨는 "민주의 도수는 단순히 '술이 독해진다'는 의미 이상이다. 왜 더 쓴 술을 찾겠나. 현실이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는 방증이다. 민주의 도수가 높아진 시기를 보면 북한 내 한류가 퍼진 시기와 일치한다. 평범한 주민들이 마시는 민주의 도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남과 북의 차이를 조금 더 선명히 그려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에 의해 북한 체제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는 북한 주민들이 북한 사회에 대한 불평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민주의 도수 변화와 소비량을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곧 북한의 여론이자, 서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북한 내 민주가 떠오르고 있다. 도수 또한 계속해서 높아진다. 이제 북한에서도 새로운 술잔 밖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할 시기가 온 건 아닐까.